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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의 공동체 주의 에 대한 고찰 (Feat.힐빌리의 노래)

David Juan Lee 2025. 5. 25. 20:38

(저는 사회학 전문가가 아니지만, 지난 미국여행에서 시작된 고찰과 그 이후의 관련 공부 그리고 힐빌리의 노래를 합쳐 제 생각을 작성해봅니다.)

단일민족국가에 사십년 가까이 적을 두고 있고, 6년간 살며 둘째까지 출산한 나라는 다민족 국가였다. (그 나라 유치원에서 애들에게 가르치는 언어만 세가지 였다.) 또 직장생활 십삼년 중에서 첫 직장 삼년을 제외한 십년은 모두 해외 /국내의 글로벌 기업에서 근무를 하며 다양한 국적의 직장동료들과 일했다. 심지어 우리 마이크로소프트 사티아 나델라CEO 의 책을 읽으면서도 그의 조직 문화 철학인 Diversity & Inclusion 에 많은 동감을 했었고 이미 내가 운영하는 조직에 그 색깔을 칠해 넣었다고 자부했었던 적도 있다.

나름 '글로벌'-'다양성' 키워드에 낯설지 않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나는, 지난 미국 여행 내내 마주치는 사람들의 끝없는 다양성에 일종의 현기증을 느꼈다. 요즘 표현으로는 ‘어질어질하다’는 말이 가장 가까웠다. 현지에서 아내와 통화하면서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정말 난해했는데, "하루 중 같은 머리색의 인간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고 아주 비약적으로 표현했지만, 실상에 비하면 아주 미약한 표현이었다. 지금도 그 장면을 정확히 묘사할 말을 찾기 어렵다. 그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거리를 채우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다큐멘터리 같았다. 물론 한국 거리에서도 개성 강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양함’은 미국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였다.

아무튼 이 현기증 속에서 난  그 서로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미국 시민들의 수용과 연대를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시민과 시민, 시민과 사회노동자, 심지어 그 공생의 범주에 사회약자 (말이 사회 약자지 조금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시큼하게 찌르는 홈리스, 서있는 자세자체가 이상한 마약중독자)들도 포함하려는 노력 역시 심심치 않게 볼수 있었고 그들의 그런 다가감 에서 억지,생색,선민의식 따위 거치레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일부 MZ 알바들이 손님을 응대하는 태도가 훨씬 차갑고 무관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단 며칠동안에도 이런 사회의 다양한 그룹간의 공생이 당연한 사회를 체감하고 보니 문득 학교다닐때 내가 배웠던 도식, 서양 : 개인주의 vs 동양 : 공동체 주의, 에 있어서 뭔가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단일민족의 유사성과 정서를 기본적으로 깔고가는 한국보다, 딱 봐도 이런 어질어질한 다양성을 하나의 그릇에 담아냈어야 했던 미국은 더 강한 유대의 공동체 주의가 필요했었을 것이고 그것은 정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 였을 것이다. '개인' 이 더 중요한 미국이기 때문에 '공동체주의' 가 동양보다 약하다 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정'이네 '위기마다 뭉치는 민족'이네 하는 미사어구로 우리의 자긍심을 흔든 한국의 공동체주의는 무엇인가? 국뽕을 고취하는 마켓팅일 뿐이었을까?  

우선 한국 (혹은 동양)의 공동체 모델 을 살펴보자.
우리의 공동체는 동질성과 유사성을 전제로 작동한다. 다들 단일민족에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비슷비슷하게 행동하고 암암리에 그 사회적 기준이 존재한다. 나이, 학벌, 지역, 가족, 취향 등 나와 닮은 사람들끼리 모여 끈끈한 유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그 바깥에 있는 존재들에겐 너무나 쉽게 배타적이 된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경계는 너무도 쉽게, 그리고 빠르게 그어진다.  '우리' 라는 선 밖으로 밀려난 익숙하지 않은 존재들은 차별과 편견, 혐오로까지 아주 쉽게 흘러간다. 결국 한국에서의 그 따뜻한 공동체는 일정한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별적 혜택처럼 말이다.  즉, 한국의 공동체는 '같음' 으로써 연대한다. 가깝고 따뜻하다. 하지만 한국의 공동체는 '다름' 을 인정하는 폭이 좁다. 즉 다양성에 취약하다.

미국의 공동체 모델을 살펴보자.
아까 언급했듯, 다양성 자체가 공동체 유지의 당위성을 전제로 한다. (다양한 이민자로 구성된 미국은 기본적으로 너무 다양해서 이걸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애초에 같이 살아갈 수가 없는 디자인이다.) 따라서 그들의 공동체는 정치적(시스템) 그리고 모두가 참여하는 시민적 공동체 이며 '차이' 를 전제로 연대한다.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거리를 두면서 서로 수용한다는 밀이다.  그렇다면 더 넓은 다양성을 수용해가며 체계와 참여가 충만한 미국의 공동체는 더 완전한가? 더 따뜻한가?  미국의 공동체는 확실히 범위는 넓지만, 그만큼 내부적인 밀도는 느슨하다. 겉으로는 제도와 원칙으로 잘 설계된 사회 같지만, 정작 누군가가 무너질 때 곁에 있어줄 사람은 없는 경우가 많다. 연대의 커버리지는 넓지만, 정서적 밀도는 낮다는 말이다. 개인 혹은 특정 지역 (힐릴리의 러스트 벨트같은 도시들) 의 쇠락은 그들의 문제일 뿐이고 시스템은 작동하지만 피상적일뿐 아니라 내밀한 돌봄이 없다. (러스트벨트 지역은 여전히 트럼프의 표심공략 및 정치적 상징성의 대상으로 이용될뿐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회복정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동일한 맥락으로 미국 오피오이드 사건으로 말미암은 미국 전역의 마약중독자 문제도 동일하게 다뤄지며 방치되고있다. 모두 구조적 문제로 발생했음에도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있다. )

정리하자면, 한국의 공동체는 '다름' 에 배타적이지만, 그 안에 들어선 이들에게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돌봄과 관계의 온기가 있다. 반면 미국의 공동체는 포용의 경계는 넓지만, 그 안에서의 정서적 끈끈함은 비교적 얇고, 힐빌리의 노래에서 너무나 잘 드러나듯 부적응자의 고통은 때로 제도의 사각지대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한국과 미국의 공동체 형태 둘다 완전치 못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가족' 이다.
힐빌리의 노래 속 가족들은 사회의 낙오자처럼 묘사되지만, 아이를 위해 몸을 던지는 외할머니의 모습, 아무도 돌보지 않는 엄마를 향해 여전히 마음을 품은 아들의 장면은 오히려 한국의 가족주의보다 더 처절하고 강렬하다. 개인주의 사회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책속에서 묘사되는 미국인에게  '가족' 의 존재는 그들의 마지막 보루이자 유일한 공동체처럼 느껴진다. 가족 중심의 공동체는 결코 한국 (혹은 동양)의 전유물이 아니며, 제도가 허물어진 곳에서는 어디서나 가장 먼저 살아나는 본능적인 유대이다.

결국 나는 이 글을 통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 다만, 더이상 우리가 배워온  동서양의 공동체 특징에 대한 조악한 도식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간의 공동체에 던져야 할 질문은 '어디가 더 따뜻한가'가 아니라, '누구까지 품는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가', 그리고 '무너질 때 누가 곁에 남는가'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 글에서 던졌던 화두, 시스템의 공백을 개인 혹인 시민이 어떻게 채워나갈수 있는가 혹은 그것이 정당한가?
나는 여전히 그 질문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