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에 남겨진 사람들: 키치에 대항하여
『힐빌리의 노래』읽고 집어든 책은 호시노미치오 작가의『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이다.
미국행 비행기 옆좌석에서 만난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이었다. 호시노 미치오는 청년시절에 알래스카에 매료되어 20년간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아낸 일본출신의 야생 사진가이다.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그의 책들에 실린 알래스카의 사진을 보며 이번 부부동반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 준비해오셨다고 했다. 그때 주고받은 연락처로 선생님과 여전히 안부를 물으며 이메일 펜팔을 하고 있다.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는 알래스카에서 야생 사진작가로서 생활기 / 알래스카에서 만난 사람들 / 알래스카 자연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된다. 중간중간 알래스카 자연에 대한 작가의 감상적 비유들이 등장하는데 사실 내겐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 작가가 읊조리는 철학적 사유는 이 책의 '킥' 이다. 아래는 그렇게 옮겨 적은 부분 중 하나 이다.
"예전에 에스키모 생활의 중심에는 카리부 (순록) 가 있었고 카리부가 전부였어. 에스키모는 철따라 카리부를 뒤쫓았지. 사람들은 카리부와 함께 하면서 정신적인 충만을 얻었어. 거기에는 완성된 생활이 있었던 거야. 그러나 언제부터 서양 문명과 함께 화폐 경제가 들어와 사람과 카리부의 관계가 약해지고, 사람들은 정신적인 충족을 점차 새로운 가치관에서 찾게 되었지. 하지만 그 새로운 가치관 이란 것이 카리부하고는 달라서 아무리 쫓아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완성된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가 버렸지."
여기서 에스키모와 카리부의 관계는 단순한 생존 수단 그 이상으로 계절을 따라 함께 움직이고 호흡하는 자연이자 그들의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명확하게 했던 삶의 방식을 뜻한다. 그 삶의 중심부가 어느 시점부터 자본주의로 이동해갔고, 그 공백의 변방에 그들은 남겨져있다. 노동이라는 리듬과 중심축을 가지고 살아 숨쉬던 러스트벨트가 산업화로 인해 변방으로 쇠락하며 남겨진 힐빌리들 처럼.
에스키모와 힐빌리. 두 존재 모두 삶의 의미가 스스로가 아닌 '시스템이 부여하는 가치' 로 대체되면서 기존 삶의 호흡이 끊어진 상태라는 공통 분모가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나는 키치를 경계한다. 서양의 자본주의가 원주민의 삶을 침공했다는 도식적인 피해 서사로 빠지거나 러스트벨트 황금기의 전통적인 가족공동체나 육체노동의 가치에 대한 감상적 노스탤지어로 이어지는 흐름은 오히려 그들의 변방을 미학적 포장으로 접근하는 외부인의 왜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키치에 휘말리지 않게 좀 거리를 두고 다시 생각해 본다.
'삶의 중심이 옮겨가는 건 결국 자연스러운 흐름 아닌가?'
문명은 항상 이동하며 중심은 고정되지 않아왔다. 문명이라는 개념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 삶의 여정이 그 작은 예이다.우리의 삶은 중심이 사라지고 다시 생기는 과정의 연속이다. 새로운 중심에 잘 집중해 나아갈 때도 있지만, 과거라는 변방에 남겨져 길을 헤맬 때도 있다.
따라서 에스키모의 오래된 삶의 중심부를 이동시킨 '서양 화폐경제' 나 힐빌리에서의 '산업화' 를 마냥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로 이해할 것은 아니다. '적응하지 못하여 변방에 남겨진 사람들' 에게 "이건 자연스러운 진화야" 라는 냉소적인 태도 혹은 "솔직히 그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가" 라는 합리적일 법한 항변 모두 힘없는 언어로 스러질 뿐이다.
안타깝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러스트 벨트, 알래스카 그외 수많은 변방의 존재들이 예전 삶의 중심부로 회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라는 노랫말은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희망을 말하지만, '지나간 것을 가슴깊이 묻어버리고 함께 노래하며 새로운 꿈을 꾸자고' 어떤 외부인이 실체적 근거로 말 할수 있을까?
그럼 우리 외부인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가?
키치에 대항하려고 하다보니 생각이 이 지점까지 와서 숨을 한번 내쉬어본다. 그리고 들이쉬는 숨에 익숙한 무력감이 딸려온다. 많은 역사의 면면을 알아가며 그 변방에 버려지고 방치된 민중들을 대면했을 때 외부인인 내가 느꼈던 무력감. 그리고 내 삶의 중심을 쫓느라 그 변방의 존재들을 서서히 잊어가는 내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게다가 지금 나와 같은 시대의 수많은 변방에 남겨진 사람들의 존재를 나는 알면서도 모른다.
나, 우리 외부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걸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낭만에 젖은 안타까움으로 책장을 덮거나,지금처럼 몇 자 끄적여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건 아닐까—그런 생각을 되뇌며…더이상 진전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챗GPT 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안녕? 오늘 아침에 너와 나눈 대화를 다시한번 쭉 읽어봤어. 이 화두로 생각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너의 첫 방향 설정에 아주 감사해. 우리의 논의의 끝이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이야. 그리고 너에게 제시한 변곡점에 남겨진 존재들에게 외부인이 갖는 시선과 최소한의 태도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하지만 뭐랄까...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조언하거나 낭만으로 포장하는 것을 경계하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야. 그 이상 우리의 역할은 제한되겠지? 세상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고 우린는 또 우리의 삶에 집중해 살아가다보면 그들은 서서히 잊혀질테고 가끔 그들을 상기시키는 어떤것으로 인해 떠올리며 한구석에 잊지 않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만족해야겠지? 사실, 이야기를 여기까지 진전시키지 않으려고 했어. 너에게 물어도 마치 이미 종착역에 도착한 기차에게 더 달릴 철로가 없는건지 다 알면서 묻는 것과 같아서 말이야."
1890년대 골드러시 이후 오랫동안 잊혀졌던 알래스카는 몇년전 유전 개발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되는 시대로 들어섰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알래스카의 오래된 말을 전한다. '알래스카는 늘 발견되고 늘 잊혀진다.'
잊힌 변방에 여전히 남겨진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보고자 애쓰는 외부인의 목소리는 지금도 조용히 떨리고 있다.
나는 묻는다. 이 목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