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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을 읽고..

David Juan Lee 2025. 6. 8. 19:46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의 존엄에 대하여

『노동의 배신』은 "노동 → 성실 → 성공"이라는 공식을 믿어온 자본주의 사회,
그 중에서도 가장 선진화된 국가인 미국에서, 오히려 노동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좀먹는가를 파고든 현장 취재 보고서다. 이 책은 작가가 저임금 노동자로 취업하고 그 수입만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쓴 현장기 로서, 시기는 1998년~2000년, 마침 요즘 내가 공부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여러 사건들이 겹치는 시기 였다.

『힐빌리의 노래』 - 오일쇼크 이후 제조업 하락으로 중산층 쇠락 (1970~1990년대)
『Pain killer』 - 퍼듀 사의 옥시콘틴 사태로 미 전역이 마약진통제 중독 (1996~2010년대)
『자본주의 그 러브스토리』 -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미국 중산층 붕괴 (2007년 ~)

내가 일련의 사건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난 미국여행에서 거리에 즐비했던 부랑자들의 배경에 궁금증을 갖으면서 '그들은 어떻게 존엄을 잃게 되었는가' 에 대한 사유였다. 하지만 이 존엄 상실의 범주가 단지 부랑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걸 깨닫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동을 잃고 복지정책에만 의지하는  '미국' '시골'  '백인' 노동자 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미국' '도시' '백인'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필수 덕목인 성실한 노동을 너무나도 충실히(투잡은 기본) 수행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는 삶의 현장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나와 동시대에, (자꾸 반복하지만) 미국에서 말이다.

아래는 작가가 청소부, 웨이트리스, 월마트 물품정리원, 노인요양사 등 미국의 최저임금 노동자 (시간당 7.5달러. 우리나라보다 더 낮으며 2009년 이후로 쭉 동결.) 로서 신음과 함께 내뱉은 독백이다. 이 처절한 독백은 실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작가가 청소부로 간 고객의 집에서 고객이 누수되는 벽에 당혹스러워 하는 걸 보고) '당신의 대리석 벽이 피를 흘리는 게 아닙니다. 저것은 전 세계의 노동자 계급, 즉 대리석을 캐 나른 노동자들, 당신이 아끼는 페르시아산 카페트를 눈이 멀 때까지 짠 사람들, 당신이 가을을 주제로 아름답게 꾸며놓은 식탁 위의 사과를 수확한 사람들, 쇠못을 만들기 위해 강철을 제련한 사람들, 트럭을 운전한 사람들,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집을 청소하려고 허리를 굽히고 쪼그리고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흘리는 피 입니다.'

"직업군으로서 청소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집단이고 우리가 보이게 되는 경우는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뿐이었다."

"누구도 우리에게 고마워하지 않는다. 모두가 우리를 무시한다. 우리에게 일은 우리가 사회에서 '왕따' 로 전락하지 않도록 구원해 주는 것이었다. "

먼저 내 글에서는 흔치 않은 작가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매번 외부인으로 발만 동동 구르며 '그렇다고 내가 가서 내부인이 되볼 수는 없잖아' 라며 합리화 하던 내 뒷통수를 얼얼하게 실천하신 분이다. (최근 근황이 어떤지 보려고 검색해봤는데 돌아가셔서 뒤늦게 너무 안타까웠다.)

그리고 난 아래를 다짐해본다.

1.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연한 존재로 여겨지며 노동하시는 분께 감사함을 아끼지 말기. (단, 선민의식이나 동정이 아닌,  같은 노동자로서 내게 편리를 주시는 것에 감사함을 표현)

2. 이용자의 탈을 쓴 노동자 (관리자) 로서 혹시 내 팀원들이 노동하는 와중 그들의 존엄이 좀 먹히는 상황이 없는지 좀 더 유심히 살필 것.

3. 나 역시 '노동' 이 내 삶의 전부인양 착각하며 내 스스로 존엄을 좀먹는 것을 경계할 것.

작가님이 온 몸으로 써내려간 이 책 덕분에, 저는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 만이 할수 있는 전부라고 믿어왔던 외부인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경계 안에서 무언가를 직접 해봐야겠다는 다짐도 하게되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작가분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